강릉, 해넘이 여행

2025. 1. 3. 23:12voyage/Korea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 너무 기쁘다는,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이뤄와서 행복하다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서울을 떠난다. 내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이 내 잘못이었다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가늠하다 길을 잃었다. 

 

떠나는 날 누군가는 대형비행기사고로 가족을 잃었다. 참사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서울역의 모두가 모여 TV를 보며 탄식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꿈이 희망이 기대가 기쁨이 있었겠지만, 사람의 삶이 이렇게 한순간이다. 멈춘 시간이 그분들께 평안이길. 죽음 뒤에 열리는 새로운 차원에 세계에서는 짐도 슬픔도 없기를. 

 

고래책방을 가고 싶었는데 강릉역에서 버스를 타자니 시간이 애매하게 번거로워 무작정 걷기 시작하다 만난 책방. 길모퉁이 조그만 공간에 가게를 낸 것 치고 구석구석 정말 세심하게 즐길거리를 마련해두었다. 달력을 사러 들른 단골 손님에게 차를 내어주는 통에 얻어마신 홍차는 돈을 받고 팔아야 할 정도로 달콤하고 향긋하다. 책을 두권 사서 창가에 앉았다. 책을 볼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지만 노트를 끄적이기는 좋은 곳. 신년운세치고 뽑은 쪽지엔 영원한 것이 없다고 적혀있다. 연말에 읽기에 참 좋은 책이라고 결제하며 책방 주인분은 말씀하셨는데, 읽고 나서도 어떤 면에서 연말에 읽기에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자기가 살아온 삶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불치병 환자가, 자기 생명의 물리적 죽음을 해방으로 곧 새 삶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일까.

 

마음이 힘들때마다 조용히 숨어있던 내 동굴 오뉴월. 연구재단 연구비지급 계좌도 개설이 다 안되었고, 출석부도 안가서 다시보내야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이 너무나도 싫어서 다 그만두고 싶은 기분으로 찾았다. 잘라내지 못한 탯줄마냥 자질구레한 일들을 줄줄이 달고 내려온 탓에, 당장 저녁까지 원고 수정본을 보내야했다. 어쩔수 없다며 랩탑을 꺼내려는데 랩탑이 없다. KTX에 놓고 내렸음을 3시간여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정신적 충격이 심해서였는지, 번아웃이 너무 세게 왔는지, 요즘 정신을 너무 놓고 살았지.. 랩탑은 나를 강릉까지 데려다주고 그새 서울로 돌아갔다가 다시 동해로 출발했다고 한다. 서울역에서 다시 찾기로 하고, 강제로 랩탑 없는 여행을 하게 됐다. 

 

아침부터 찾은 바다텃밭랩. 송고버섯파니니가 그리워 찾았는데 전같지 않다. 더이상 송고버섯도 아니고 트러플 향도 없고 치즈 향도 blend하다. 인테리어도 여름에 공사를 한 뒤 공간은 넓어져서 좋은데 사람들도 많아서 전같이 호젓하지는 않다. 유일하게 남아있는건 세심하고 친절한 주인분들...인데 저분들이었던가? 아니었던것 같기도 하고. 

내 주변 세심하다못해 예민해서 미쳐버린것 같은 예술,인문계 남자들이 지겨워 생활에선 그런 이들을 만나지 않기를 소망했던가. 이번 여행에 유독 극도로 세심한 남자분들을 많이 만난것 같다. 서점에서도 그랬고 이곳의 주인분도 그렇고.. 식기부터 DP까지, 마지막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포장해 나가는데 거스름돈을 일일이 챙겨 주시는것까지 극도로 세심하시다.

 

삼양목장을 가고 싶었는데 눈이 안와서 헐벗었다길래 간 국립대관령치유의숲. 은 무슨 저넓은 대관령에 나혼자인데 무서워서 정말.. 그러나 나는 악에 받쳐있었으므로 가서 있는대로 소리를 지르고 왔다.

 

이 직업의 장점이 있다면 주차장 걱정없다는거 아닐까. 주말엔 주차장 찾을일이 없고, 평일엔 아무데나 종교 시설 보이면 차 댄다. 초당동에 유명한 라멘집엔 주차장이 없는데, 쿨하게 감리교회에 차대고 가서 밥먹고 초당성당 왔다. 10분같은 기도 한시간.. 강릉은 무속신앙의 느낌이 센데 기도처들의 느낌도 만만치 않게 세다.  

 

내가 사랑하는 호텔. 오션뷰도 너무 예쁘고 앞의 해변도 아주 호젓하고 호텔리어분들도 친절하고 조식도 맛있고 일하기도 좋은 분위기라 너무 좋아했는데 한가지 불만거리가 룸이 너무 낡았단 것이었다. 레노베이션 후 재개장해서 방문했는데 만족도 1000%이다. 아직 가오픈이라 구비되지 않은 것이 많다고 하는데 암요 암요 정식오픈하면 다시 가야지.. 옆에 신라 모노그램을 짓고 있는데 리조트가 들어와도 뷰를 가리는것 없이 탁 트여서 매우 마음에 든다. 위치가 조금 애매해서 식음료와 레저시설, 소카존 등등이 없는게 단점이었는데, 리조트 들어오면 온갖 편의시설 다 들어올테니 불편한 부분도 다 상쇄되겠지.

 

송정의 아침. 7:20 일출인줄 알았는데 해가 안떠서 강문까지 걸어가다보니 해가 떴다.

송정바다. 눈올때 또 오고싶다.

 

그동안엔 소돌을 주로 찾았는데 근방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지 온갖 플랜카드가 붙어있고 쓰레기며 이것저것 지저분해졌다. 대안으로 영진해변. 오션뷰로 유명한 카페가 막 오픈시간이라 한적할때 들어가 바다를 마음껏 봤다.

 

 

내가 정말 싫어하고 우리식구들은 정말 좋아하는 디저트집이 있는데, 거기서 포장하고 시간이 좀 남아 어떻게 시간을 때울까 궁리하다 들어간 브런치집. 처음부터 다 만든 판나코타를 내어준다. 이번 여행, 전체적으로 영원한 것은 없어서 모든 것이 다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도 배웠고.. 또 반대로 우연히 발견하게 된 기쁨도 있다. 이 카페도 마찬가지로, 다음 여행에 브런치를 하러 와도 좋을것 같아. 

 

 

마지막 해넘이는 서울에서. 내년이라고 크게 다를것 같지는 않지만, 계획이 어그러진게 아니라 선물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길, 주어진 것들을 선물처럼 기뻐할 수 있는 날들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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