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 00:57ㆍl'ecrit/le journal
소논문 투고를 마무리하고 당일치기로 부산에 갈까 하다가, 도착시간이 너무 애매해 포기했다. 시간뿐 아니라 비용도 지난달(벌써 지난달이 되어버렸다) 경조사비만 X백만원이 나갔고, 쉴새없이 쏟아부은 술값까지 더하니 공연이나 여행을 하지 않았는데도 지출이 어마어마하다. 교연비와 원고 착수금 그리고 연말정산 들어오겠지만, 지금 당장은 앉아있기로 했다. 3월 연구재단 마감이나 개강 준비때문에, 여유가 나려면 이번주 아니면 4월 말까지 기다려야 할텐데.. 또 어디를 갔다온들 만족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로마니들의 음악을 들으며 H선생님의 자서전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 나는 스물 여섯 살, 막 캐나다에서 돌아와 무슨 이유에서인지 생전 안가던 강남 교보에 가서 시간때우기 용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오글거린다는 생각. 드라마 퀸이신가 하는 생각. 자의식과잉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W를 만나기 전이었고, 삶의 모든 것이 다 타버리고 비와 바람에 씻겨 남은 백골에 꽃이 핀다는게 무슨 뜻인지 알리가 없던 스물 여섯살이었다. 그 후로 10년, 나 또한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어버리고 떠난 남자의 환영을 등 뒤에 지고 삶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때마다 그의 꿈을 꾸다 혼자 깨어나곤 했다. 그 매번의 지옥같은 아침, 스스로에게 나만큼은 너의 진실함을 안다고 네 남은 생의 첫날을 축하한다고 말하며 울던 그 아침들. 이 책의 내용과 꼭 같은 짓을 하게 될 줄도 몰랐고, 남의 일일 뿐 이 마음이 무엇인지 난 알게 될 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스물 여섯살이었다. 이 감상적이고 때로는 일관성 없는 줄글들이 이리저리 뒤섞인것 같은 이 글이 내게는 예언서일 줄 몰랐던 스물 여섯 살. 그래서 죽을 수 있는 준비라는 게 무엇인지, 전권을 다 읽고 나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스물 여섯 살. 몇시간짜리 굿판이 아니라,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이 생의 모든 시간이 작두 위에 올라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던 스물 여섯 살.
첫 만남으로부터 13년이 지나 삶이 답 없이 무의미한 어둠으로 속절없이 가라앉는 이 시간, 이 감상적이고 과장된 문장들이 내 삶의 길잡이가 된다. 제행무상이라는 말. 이만한 외로움도 없이 누리는 자유는 천박하다는 따끔한 말. 남자는 속일 수 없는 여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너는 너무나도 진짜라는 말. 그의 영혼을 가졌으니 육신이야 다른 여자와 좀 나누어 가지면 어떠냐는 의연한 농담. 배신은 나의 사랑과 욕망과 믿음이 당하는 것이라는 말. 너의 집에는 머무를 방이 없어도 다녀갈 방이 있으니 온 우주로 창문이 열려있는 집에 살며 아름다운 이들을 맞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위로. 네가 뭐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으니 일단 죽지만 말고 살아달라는 애원. 내 찢어진 마음 조각을 모아 성소를 만들겠다는 서약. 삶을 기뻐하라는, Joy 안에 머물라는 그 모든 말들.
내면의 세계가 다 타버려 하얀 잿더미만 날리는 듯 하던 20대였다. 잿더미로 만든 하얀 사막을 맨발로 걷는 듯한 30대를 보냈고,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디디던 재의 촉감은 낮에는 지극히 뜨거워 발을 태우고 밤에는 무엇보다도 차가워 탄 부위가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눈을 떠서 보는 꿈엔 홀로 건너야 하는 하얀 사막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고, 눈을 감고 보는 꿈에선 낡고 어두침침한 적산가옥의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이불도 제대로 얻지 못한 다른 고아들과 바글바글 부대끼며 한 자리를 얻고자 얼어죽지 않고자 고군분투하곤 했다. 시카고로 갈 때, 이스라엘로 갈 때, 아틀란타로 갈때, 박사에 들어갈 때, 퀄 시험을 볼 때까지도. 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꿈에 나타나 나를 비웃고 희롱하던 그의 얼굴에 대고 다음번엔 오지 말라고 말할 때까지, 몇 번의 아침을 비참해하며 시작했는지 셀 수 없다. 제행무상인 것을. 나 조차도 변한것을.
마음속 거대한 잿더미를 처분하지 못해 절절매며 20대를 보냈다. 이젠 정원에 비료로 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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