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gin again

2024. 9. 20. 22:36l'ecrit/le journal

추석, 조용하고 조용하고, 또 조용하게 보냈다. 추석전주 수요일 수업끝나고부터 다음주 월요일까지 근 12일정도가 휴가라 어디 여행을 다녀올까 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 있어서.. 중간고사때문에 빌 예정인 10월을 기약했다. 어쩐지 많이 졸립고 피곤해서 많이 자고, 누워있고, 암워킹 연습을 하고, 지쳐서 또 누워있고.. 천하의 우리엄마도 이제 부엌일이 지겨우시다고(드디어) 명절음식도 간소화해서 동생네가 온 하루만 고기굽고 이것저것 해서 먹고 거의 사먹거나 시켜먹거나 했다. 추석 다음날은 온천에 다녀오고.. 카페에 가서 책을 보거나 서울에 다녀오거나 했다. 하는게 없을수록 시간은 빨리간다.

 

연휴에 이것저것 우주를 소재로 한 에세이도 보고, 시집도 보고, 소설도 몇 권 봤는데 본 책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마가렛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 한 시간이면 후루룩 다 읽는데 시녀이야기처럼 선득한 느낌은 없지만 무기력하고 미련한 페넬로페에게서 나를 많이 봤달까.. 처연하고 불쌍한 낯을 하고 와서 징징거리면 무조건 불쌍히 여기며 속곤 했던 내 과거를 봤달까. 텔레마코스에 대한 처벌은 없는게 화가 났달까.

 

연휴를 마치고 운동을 가니 캐치업할 게 넘쳐난다. 노을사진 강아지사진 구경하고 양자물리학 얘기 듣느라 바쁘다. 숙제처럼 남은 맨몸운동과 마이마운틴 1시간.. 700칼로리 소모가 정말 되는걸까. 집에와서 미친듯한 허기에 뭔가를 계속 줏어먹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연휴 마지막날 갔던 광화문엔 거리예술축제가 한창이다. 한참 뙤약볕에서 구경하다가 허기져서 들어간 버거집에서 코카콜라 이벤트 당첨. 생전 복권이나 이런거 되는 일이 없었는데, 제로콜라 한캔이라도 당첨된게 신기해. 새로운 추석이 또 오기까지는 좀 행운이 깃드는 한 해면 좋겠는데 말야.

 

요즘 빠져있는 스타벅스 햄치즈어니언샌드위치. 카라멜라이즈 양파가 너무너무 맛있는것이에요.. 시럽펌핑 안한 밀크티와 함께 먹으면 천국이다.

 

이대로 연휴를 보내기가 아까워 태풍오는 오사카라도 갈까 하다가, 쏟아지는 비에 단념하곤 비긴어게인 관람. 너무나도 내 이야기인데 슬프지 않은건 새로운 날이 왔고, 내 장미가 이미 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레타가 공연장에서 사라져버리는 그 모먼트, 내가 알던 사람은 이미 옛날의 그가 아니고 우리는 되돌아갈수 없다는 그 흔한 명제를 깨달은 사람의 모먼트. 나를 저주하던 순간까지도 바보같이 사랑했던, 누군가를 마음껏 미워하고 잊어버리고 버려버려도 된다는 사실이 내게 자유를 줬다. 마지막 씬의 그레타가 지하철을 타지도 걷지도 않고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느끼는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모든걸 가진것 같으니, 세상이 쉬워보였을까. 사무치게 궁금했다. 세상이 다 너의 뜻대로 되는것 같으니 뭐든 너의 마음대로 내팽겨치고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것 같아? 함부로 매도하고 판단하고 비웃고 적선하듯이 손을 내밀면 황송하다는 듯이 와서 붙잡을 버러지라고 생각했어? 제 주둥이로 엄마도 이렇게는 안챙겨준다고 할 정도로 보살핀 바로 그 후배와 놀아난 주제에. 아, 친분일 뿐인데 내가 오해한다고 했지, 내 머릿속이 더러워서. 솔직히 말해봐, 내 주제에 감히 너를 떠날줄은 몰랐다고. 매번 그래 괜찮아 좋아만 하는 내가 쉽고 만만했다고. 지금도 상황이 안좋을 뿐 네가 손을 내밀면 언제든 나는 널 잡을거라고. 마음껏 착각해. 니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으니까.

이미 6년, 7년이 되는 그 시간을 떼어놓고 사람 하나만 잘라낼수 없었기에 나는 그 모든 시간을 잘라내면서 팔이 잘려나간 기분에 시달렸다. 팔이 없는 기분. 이제는 다시 정상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 같은 기분. 염치도 양심도 없이 동네방네 죽는 소리를 하고 다니는 때까지도 나는 죽어갔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 고통들. 그저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것만, 다시는 얽히지 않겠다는것만 교훈으로 내게 남긴 그 고통. 

 

나보고 이상하대, 이해할수가 없대, 라고 말하니 아니 이해를 해야돼? 그런가보다 하면 되지 나도 지들 이해안되는데 뭘 지들이 이해를 하고말고야? 라고 대답한 목소리 덕에, 내 마음속에서 어떻게든 찾아내려 애를 써야 희미하게 들리던 그 소리를 이렇게 분명하게 말해주는 그 목소리들덕에. 나는 잘라낸 팔에 의수를 낄수 있게 됐다. 팔이 없으면 의수 달면 되지. 의수로도 암워킹 할 수 있어. 그런대로 괜찮아. 아니, 솔직히 멋지지 않냐? 의수달고 암워킹이 된다고? 나의 하루를 경탄으로 채워주는 목소리들 덕에 나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꺼지든 말든 상관없어. 내 하루는 시작됐으니까. 기본도 안된 너따위가 어떻게 글을 내겠느냐고 영어공부나 다시 하고 오라고 비웃던 그 찢어버리고 싶던 얼굴들 덕에 8년을 묵혀둔 페이퍼를 제출했다. 사실 7개월에 걸쳐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고도 계속 미루던 것이었다. 선정이 되지 않을수도 있지. 다시 써서 다시 심사받으라고 할수도 있다. 하면 되지. 녹음실 빌릴 돈이 없어 길에서 레코딩을 해도 그걸 내가 결정하면 빵빵거리는 클랙션 소리와 새소리도 멋진 도시의 BGM이 된다. 

 

Everything's coming up roses, Roses

 

그래, 이대로 모든것이 장밋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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