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0. 22:25ㆍvoyage/Seoul
아내와 40년가까이 해로했고 아내가 그림의 주요 모델이었음에도, 그림을 관통하는 정서가 고독이었던 이유는 평생 관계가 좋지 않았던 자신들에 대한 반추일까. 남편은 넘치는 재능에도 자기 일을 그만두고 매니저로서 살아갔던 아내의 희생에 감사한 마음보단 아내의 수다스러움이 싫은 마음이 더 컸고, 아내는 그런 남편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이 싫었다고 했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랑에 미쳐서 인생을 송두리째 올인한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남편과의 관계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그 고독을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또 얼마나 고독했을까. 그래서인지 그림속 사람들은 언제나 외로움과 무상함에 둘러싸여있다.
지나친 욕심이었음을 알면 좀 나았을까. 남편에게 위로와 격려, 정서적인 동반을 바라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바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생은 독신이나 기혼이나 부모가 되든 되지 않았든 모두에게 공평하게 고독하다는 것을. 그건 나쁜게 아니라 나를 위한 빈자리라는 것을. 나 말고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이니, 누구를 위해서도 전부를 내어주지 말고 언제나 내것을 만들어서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것을. 호퍼의 Woman in the Sun은 두 사람이 작고하기 불과 5-6년전의 그림이다. 그제서야 화가는 지나온 시간들을 직시하게 되었는지도. 수다스런 아내가 자신만큼 고독했음을 그리고 그 근원을 발견했는지도. 자신은 그나마 기회를 얻었으나 아내는 끝내 자신을 채울 기회를 얻지 못했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귀찮아서 미루고 있었는데, 같이 갈래 물어봐준 U선배 덕에 그림을 내리기 며칠 전 다녀올 수 있었다. 선배는 몇 년전 아내와 이혼했다. 가져온 유학자금으로 한 3년간 즐겁게 해외생활을 즐기다, 슬슬 유학이 생존모드가 되자 시체처럼 사는게 싫다고 자기 일을 하겠다며 한국에 돌아갔던 사람. 늘 선배는 변명처럼 입버릇처럼, 자기 파트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자신들이 얼마나 소울메이트같은 한 쌍인지 강변하며 아내가 곧 다시 돌아올거라 했었다. 그렇게 4년이던가, 길어지는 논문과정과 유학, 깊어지는 경제적 어려움에 지쳐 잠깐만이라도 돌아와주길 부탁했을 때 선배는 이혼 청구서를 받았다. 자기 커리어를 놓고 올 수 없다던가.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다른 남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선배는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혼도장을 찍었고 논문을 썼고 졸업을 했고 한국에 돌아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선배는 그 사람이 좋아하던 작가였다고 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이혼을 하고 나서야 왜 호퍼 그림이 좋은지 알겠더라고 했다. 먼저 물을 생각은 없었는데 자꾸 저렇게 얘기를 꺼내니 물어볼 수 밖에. 만나보셨어요. 본인은 아니고 엑스의 가족들과 주변 친구들을 만났다고 했다. 특히 엑스의 가족은 점심먹자고 만났다가 결국 저녁먹고 차까지 마시고 헤어졌다고. 정말로 깊이 후회하고 있다고, 그만한 사람 없는데 내가 미쳤었다는 말을 전해줬다고 했다. 용서하지 않으시겠어요? 라는 다소 무례한 질문에 선배는 대답했다. 다시 만나면 너무 좋겠지 사랑하던 사람이고 날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동시에 너무 힘들거야. 그 사람은 자기한테 다 맞춰주던 내가 그리운 거고 또 내가 다 맞춰주길 기대하겠지. 하지만 내가 힘들때 그 사람이 한번쯤은 곁에 있어줄거란 신뢰 조차 깨진 이상, 우린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수 없어.
다시보니 질문이 틀렸다. 용서를 구해야 용서를 하지.
선배가 한 잘못을 굳이 꼽자면, 자기 마음을 다 줘버린 것이었다. 자기 고독의 자리까지 다 줘버린 탓에 엑스는 열쇠를 가졌다. 타인으로선 도무지 알수 없는 선배의 허무를 열고 채우는 열쇠를. 그래서 엑스는 선배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다. 다른 어떤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만나도 대체되지 않는 사람. 내 마음을 들여다볼줄 아는 사람을 만나도, 어딘가 마음의 한 자락에선 놓고 온 것이 있는 듯 나를 허전하게 만드는 사람. 차라리 혼자 살아야겠다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 용서할수 없다면서도 결국 발걸음은 한자리를 맴돌며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 아마 직접 찾아왔다면, 선배는 이 전시회에 내가 아니라 엑스를 데려왔을 것이다. 아내의 고독을 직시하는 화가의 그림을 함께 보며, 과거에 자신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에게서 보지 못했던 고독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렇게 서로에게 자신을 많이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했었는지. 불가능하다 해도 서로를 채워주려고 노력은 했었는지. 함께 되짚을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몇년만에, 그것도 부모와 친구를 보냈으니 무책임하고 비겁하게 느껴졌을까. 염치가 없어서, 안만나줄까봐 무서워서. 여린듯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말이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언제나 책임지는건 너였으니 이번에도 네가 나를 책임지라는, 내게도 보이는 그것이 선배 눈에 안보였을리가 없다. 선배는 그러니 내가 너무 힘들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고 이해하고 또 맞추는 것은 선배의 몫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런 자신을 싫어해도, 그렇게 만드는 엑스가 너무 미워도, 선배는 그런 사람이니까. 내가 가장 힘들때 나부터 놔버린 것을 잊을 수 없다면서도, 그 사람이 좋아하던 작가를 이제는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기에 전시회를 찾아오는 사람. 화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사람. 그 사람에게 잘 말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내레이션 하며 자기를 계속 돌아보고 이해하고 정리하는 사람.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청중은 사실 필요없다는 것을 선배는 조만간 알게 될까. 남의 이야기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답해주며 선배는 결국 깨달았을까. 이미 착실히 용서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모로 직무유기를 했다. 같이 오지 그러셨어요, 새롭게 보이는게 있었을텐데 라고 물을 것을. 사실 나는 선배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서. 그게 안된다고 해도 바라보는 내 입장은 그랬으면 좋겠어서. 순애보 재미없어요, 다음번엔 화려한 연애담 들려주세요 라고 말하며 선배를 홀로 두고 미술관에서 내려오는 길 정동교회 광장에 쏟아지는 햇살이 찬란했다. 마치 언제나 변하지 않고 영원 전부터 한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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